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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6. 6世 〉16. <부정공>가선대부함길도병마절도사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시절민공시장(嘉善大夫咸吉道兵馬節度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諡節愍公諡狀)
1. 문헌 목록 〉6. 6世 〉18. <부정공>정부인창녕성씨할머님묘소사실서(貞夫人昌寧成氏墓所事實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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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부정공>절민공신도비명(節愍公神道碑銘)
절민공신도비명(節愍公神道碑銘) 嗚呼我 端廟遜位之際或生或死盡義全節之人指不勝摟而至若父子並命斷斷衷赤與日月爭光者惟朴忠正成忠肅暨節愍趙公是耳公諱崇文字武伯竹村其號也系出玉川高麗侍中諱璋始見於譜曾祖諱佺文科追封玉川府院君祖諱元吉文科門下侍中襲封玉川府院君諡忠獻享武夷院考諱瑜文科典農寺副正時喪制紊弛士大夫皆百日即吉公獨廬墓哀禮俱盡入我 朝除漢城府判尹不就 世宗命旌曰孝子前副正者盖並褒其忠也享謙川祠委禽於潭陽鞠氏之門生子二二其公也公生而詩禮是襲勤遵規矩才略殊凡兼習弓馬中 英陵武科屢遷至節度使建節北方邊警永息其英勇槩可想已乙亥之變引病退居謂其子哲山曰事已至此只有一死而已相對涕泣至丙子與六臣謀復事泄被逮鄭昌孫等與公有舊諷以生道公張目大叱曰吾平生食人之 食而忘其恩者曾犬豕之不若歸見謹甫於地下足矣又顧謂其子曰爾亦見爾父無怍於地下也乃父子同殉噫其烈哉昭載 魯陵誌及招魂記與海東忠義錄輿地誌等 光廟戊寅駐蹕於東鶴寺書下冤死諸臣姓名優給田結使之招魂祭之仍 敎曰後世忠臣 宣廟辛未有丙子被禍人子孫錄用之命公之玄孫愷與其從弟信倫俱除寝郎 正廟己亥旌父子閭辛亥配食 莊陵壇己未 贈兵曹判書曰趙崇文之於成勝如奉汝諧之於朴彭年既是密戚理無獨免且其引病退去相對涕泣蹟之優異父子同然弘齋全書謹按而可覩也 憲宗癸卯賜諡節愍 高宗甲辰賜額 肅慕殿於是乎列朝崇報之典至矣盡矣猗歟盛矣嗚呼公之貞忠卓節固可以撑字宙而扶綱常况復 王言如綍昭雪冤枉永有辭於天下萬世矣亦何恨於公也配貞夫人昌寧成氏中樞府事襄惠公達生其考也葬於順天治南雲谷之里坐辛之原而失其傳者久矣至六世孫侃爲父穿壙得玄石之徵以衣帶招公魂而合封焉生一男二女男即哲山 贈童蒙敎官女適呉信孫金日躋哲山男瓊坐謫幸州久而蒙宥後孫昶烈在玉鶴洙與闔宗詢議將伐大石峙大達以備累百載靡遑之儀問銘于不佞自顧謏學固不敢當是役然氣義所感不揆僭妄乃爲之銘銘曰 玉川名門篤生維公出倫之勇貫日之忠屏翰于北野人讋伏衋矣乙亥邦命飜覆迺與六臣圖復吾王機失於敏謀用不藏恨徹蒼穹念斷赤族父兮子兮一時就戮碧血淋漓人紀頼植 列聖與悲既旌且職節惠爼豆靡不用極若苗若裔蔓延南國烝禴孔明報施不忒雲谷之原有山屴崱載銘樂石昭視千億過此貳心曷敢不式 檀紀四千二百九十九年丙午三月 日 謹立 成均館長 安東 金舜東 撰 절민공신도비명(節愍公神道碑銘) 오홉다. 이조 단종(端宗) 大王이 양위(讓位)할 때 혹 살고, 혹 죽으며 온전히 절의를 다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이겨 끌 수 없고, 父子 함께 죽음을 당하여 전일한 붉은 충정이 해와 달로 더불어 빛을 다툰 자는 오직 박충정(彭年) 성충숙(三問) 및 절민조공이시다. 공의 휘는 崇文이요, 자는 무백(武伯)이며 호는 竹村이고, 玉川趙氏인데, 고려 시중 휘 장(璋)이 비로소 보첩에 보이고, 증조 휘 전(佺)은 文科하여, 추봉(追封) 玉川府院君이요, 祖 휘 元吉은 文科에 올라 門下侍中으로 玉川府院君을 이어받아 시호는 충헌(忠獻)이며, 武夷院에 배향되었으며, 고(考) 휘 유(瑜)는 文科로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인데, 때에 상례(喪禮)가 문란하여, 士大夫가 다 百日탈복하는데, 공은 홀로 시묘하며 슬픔과 예제를 극진히 하셨다. 이조에서 漢城判尹을 제수해도 나아가지 않으니 世宗大王께서 孝子前副正이라 정문을 내려 함께 그 충절을 장포하시고 謙川祠에서 치제(致祭)하며, 潭陽鞠氏 家門에 취처하여 두 아들을 낳으시니, 공이 次男이시다. 공이 태어나시어 詩禮를 이어받아 삼가 법도를 따르고 재주와 지모가 보통보다 달랐으며 겸해서 활과 말을 익히더니, 世宗때 武科에 올라 여러 번 옮겨 節度使가 되어, 인절(印節)을 北方에 세우매, 변방 동란이 길이 사라지니, 그 영용(英勇)을 가히 상상 하리로다. 을해년 國變에 신병을 이유로 물러나 그 아들 철산(哲山)에게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다만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르고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병자년에 이르러 六臣으로 더불어 단종 복위를 모의한 일이 탄로나, 체포되니 鄭昌孫의 무리가 공과 구면이 있는지라, 살아 날 도리로써 빗대어 말하니 공이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짓되, 내 평생에 사람의 밥을 먹고 그 은혜를 잊은 자는 일찍 개나 돼지만 같지 못하게 본다하며, 地下에가서 근보(謹甫)를 보면 족하다하고, 또 그 아들을 돌아보며 너도 네 아비를 地下에서 보는 것이 부끄럼이 없을 것이다. 하고 父子함께 순절하였으니 아! 그 장렬이 노릉지(魯陵誌) 및 초혼기(招魂記) 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 여지지(輿地誌) 등에 소상히 실렸다. 世祖 戊寅년에 어가를 東鶴寺에 머물고 원통하게 죽은 모든 신하의 성명을 써서 보이며 넉넉하게 田畓을 주고 혼을 불러 치제하라 하고 인하여, 후세 충신이라 교시하였다. 宣祖 辛未년에 병자년에 참화를 입은 자손을 녹용(錄用)하란 명령이 내려 공의 현손 개(愷)와 그 종제 信倫이 함께 침랑(寝郎參奉)에 제배되었고, 正祖 己亥년에 父子의 이문을 정표하고, 신해년에 장릉단(莊陵壇)에 배식하였으며, 기미년에 병조판서를 증직하며 趙崇文과 成勝은 봉여해(奉汝諧)와 박팽년(朴彭年) 같이 이미 가까운 친척이니 홀로 면할 이치가 없고, 또 병을 칭탁하고 물러앉아 서로 대하여 체읍(涕泣)한 행적이 父子同然하다 한 것은 삼가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안찰하여 옳게 보았도다. 헌종계묘(憲宗癸卯)년에 절민(節愍)이라 시호를 주시고, 高宗 甲辰년에 숙모전(肅慕 殿)이라 액호를 내리시니 이제야 列聖朝에서 베푼 은전이 지극히 높으니, 거룩하고 성 대하도다. 아! 공의 곧은 충성과 높은 절의는 진실로 가히 天地에 가득 차 벼리를 붙잡을 것 인데, 이제 또 임금의 말씀이 이와 같이, 장포하시고 원억한 것을 밝혀 써서 天下萬世에 말을 남겼으니, 공에게 무슨 여한이 있으리오. 배 정부인 昌寧成氏는 中樞府事 襄惠公達生의 따님으로 順天治上沙面 南雲谷里之坐辛之原에 모셨다가, 오래 失傳하였는데, 六世孫 간(侃)이 아버지 장예천광을 하다가 지석(誌石)의 증거가 발현되어 衣帶로 공의 혼을 불러 합봉하였다. 一男二女를 두어 男哲山은 증직 童蒙敎官이요, 呉信孫 金日躋는 女婿며, 손자 경(瓊)은 幸州로 귀양갔다가 오래 되어 풀려나 故里로 돌아왔다. 後孫 昶烈과 在玉鶴洙가 宗族과 합의하여 큰 돌을 세워 수백 년 이루지 못한 묘의(墓儀)를 갖추고저 나에게 銘을 청하였다. 돌아보니 나의 천식으로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나 성의에 감동되어 참월함을 헤아리지 않고 새겨 가로되, 옥천 이름난 가문에 玉川名門 도타운 이 공을 낳았다. 篤生維公 무리에 뛰어난 용맹이요 出倫之勇 해를 꿴 충성이로다. 貫日之忠 북방의 울타리가 되니 屏翰于北 야인이 두려워 움추렸네. 野人讋伏 슬프다 을해년에는 衋矣乙亥 나라 운명이 뒤엎어졌네. 邦命飜覆 이에 六신으로 더불어 迺與六臣 우리 임금의 복위를 서둘다가 圖復吾王 기틀이 민첩치 못하고 機失於敏 지모가 밝지 못하여 謀用不藏 원한은 하늘에 사무치고 恨徹蒼穹 생각은 끊기고 겨레의 피만 붉어 念斷赤族 아버지와 아들이 父兮子兮 한때에 형장에 끌려가 一時就戮 푸른색 진한 피가 지적거리나 碧血淋漓 벼리는 바로 잡았네. 人紀頼植 여러 대 임금이 슬퍼하여 列聖與悲 이미 정표하고 또 증직하며 既旌且職 시호를 내리고 단과사에 모셔 節惠爼豆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네. 靡不用極 많은 후손이 若苗若裔 남국에 년출같이 뻗어 蔓延南國 사시에 제향이 심히 밝으니 烝福孔明 갚고 베품이 틀림없네. 報施不忒 운곡의 언덕에 雲谷之原 있는 큰 산에 有山屴崱 좋은 돌을 갈아 명을 새겨 載銘樂石 장엄한 사행 천추에 보이니 昭視千億 두 마음 가지고 지내는 자 過此貳心 어찌 감히 머리 아니 숙이겠는가. 曷敢不式 檀紀四千二百九十九年丙午三月 日 謹立 成均館長 安東 金舜東 지음 哲學博士 驪興 閔泰植 씀 成均館副館長 杞溪 兪致雄 전 註:홍재전서(弘齋全書):이조 정조(正祖)의 시문(詩文), 윤음(綸音), 교지(敎旨) 등을 모은 전집. 모두 一八四권 一○○책.
 
1. 문헌 목록 〉6. 6世 〉16. <부정공>가선대부함길도병마절도사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시절민공시장(嘉善大夫咸吉道兵馬節度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諡節愍公諡狀)
1. 문헌 목록 〉6. 6世 〉18. <부정공>정부인창녕성씨할머님묘소사실서(貞夫人昌寧成氏墓所事實叙)